티스토리 뷰

한인들은 줄잡아 2백여명. 그후 50년대 중반까지 개별적으로 입북한 인사들까지 합하면 모두 4백27명이라는 증언도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을 지내다 57년말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 카자흐공화국 수도 알마아타시에 있는 한인신문 고려일보 부주필로 있는 정상진씨(73·일명 정율)의 증언. 『정치일꾼으로 참여한 이른바 정통 「소련파」 2백여명은 편의상 입북시기를 기준으로 1진부터

모두 53명이었다. 북한에서 외무성 부상을 지내다 59년말 소련파로 몰려 자진귀국형식으로 소련으로 되돌아가 소련과학아카데미 동방학연구소 선임연구위원으로 있는 박길용 박사(73·모스크바시)의 증언. googletag.cmd.push(function() {

산파역을 맡았습니다. 조만식 선생도 그가 소련 25군 정치부내의 유일한 한인인데다 정치적 식견이 높고 성격이 원만해 인간적으로 그를 신뢰했습니다. 고당이 45년 10월 하순께 고향에서 잡아온 꿩 두마리를 들고 찾아와 북한 정국을 논의하기도 했었다는 말을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 강소좌의 부인 루드밀라 여사(67)로부터 들었습니다. 또 전동혁·조기천·임하·김세일 등 문필가들은 평양역전에 소련군 신문사를 조직하여 한글신문을 발행,인민들에게 「김일성장군」을 홍보하는 역할을 맡았지요. 전동혁은 45년 10월14일 「김일성장군 환영대회」의 김일성 연설문을 직접 작성한 사람이지요.』 제2진은 10월 중순 평양에 도착했다. 소련에서 주로 사범대학이나 러시아어학과 등을 졸업한 박영빈·김일·박길용·박태섭·허학철·천률·박춘·김단·천의완·오표돌·박태준 등

지시로 북한에 파견되어 북한정권에 참여,김일성을 돕다가 「소련파」로 몰려 숙청돼 망명·탈출 또는 자진귀국 형식으로 소련에 되돌아가 현재 생존해 있는 인사는 30여명뿐. 김일성 정권에 참여했던 소련파 인사 2백여명중 대부분은 소련으로 되돌아간 후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 늙고 병들어 사망,후손들이 현재 소련에서 살고 있다. 파북 소련파 인사중 현재까지

남도당위원장·군총정치국장) 강상호(내무성 부상) 이춘백(군정찰국장) 김 택영(사법성 부상) 기석복(로동신문 주필) 김승화(내각사무국장·건설상) 김렬(함북 도당위원장·공업성 부상) 허빈(황북 도당위원장) 김동철(최고 재판소 부소장) 김찬(조선은행 총재·재정성부상) 김영수(도인민위원회 위원장) 박영(도당위원장) 정국록(민주조선 주필·정전위 수석대표) 고히 만(임업상·중앙당 부장) 박창식(자강도인민위원장) 안동수(사단정치부장) 이동건(외무성 부상) 등이다. 제4진은 기술자 및 간부그룹으로 46년 여름 평양에 도착했다. 남일(인민군 총참모장·외무상·내각부수상) 장익환(교육성 부상) 김동학 (최고검찰소 부소장) 박원무(전기성 부상) 김영삼(전기성 부상) 김학인 (내각호위처장)

교원) ▲김이딸리(건설성 기사) 이상. 끝. 제 20편에서 계속~~ 왜 남주가 북한장교이며 북한군 서열1위 총정치국장의 아들인지 ㅋㅋㅋ 그것도 현빈이야 드라마 나오는 현빈 아버지가 북한 총정치국장인데 얼마나 파워가 좋은지 외제차 타고 다이렉트로 신호도 무정차 통과 해버리니 얼마나 끗발이 쎈 직책인지 다들 검색하느라 난리네요 ㅋㅋ 사랑의 불시착 어제 첫방 보고

박일(김일성대 부총장) 김이노겐치(건설성 부상) 천치억 (도로국장) 이문일(조선통신사 사장) 정철우(기갑여단장) 장주익(과학원 서기장) 등 36명이다. 제4진에 이어 1개월후인 46년 9월 입북한 제5진은 주로 러시아어 교원그룹 20명. 박병률(강동정치학원장) 주광무(내무성 예심처장) 오기흥(체신성부상) 박라오니드(수송대 대장) 김칠성(해군참모장) 장돈야(여·김일성대 교수) 강소피아(여·당중앙학교 교원) 심수철(인민군 간부국 부국장) 이황용(인 민군 병기국장) 김용수(출판지도국장) 박일영(체코대사) 김광(무역성부상)

때문에 당시 북한정세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지요. 소련군 수뇌부는 조만식 선생을 끌어들이는데 안간힘을 쏟았지요. 그러나 조만식 선생은 자신의 민족·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많은 지식인들과 지주·청년층이 그를 추앙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소련군 지도부는 소련정부에 공산당 조직과 정칟행정경험이 있는 소련의 한인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요. 이 그룹이 바로 소련파 제3진에 해당됩니다.』 제3진이 평양에 도착한 것은 45년 12월 초순. 전반적으로 제1,2진보다 비중이 높은 간부들이 많아 이들은 북한에 가서 당과 국가기관에서 중요한 직책을 담당했다. ○3진에 거물들 많아 허가이(당부위원장) 박의완(내각부수상) 방학세(사회안전상) 김재욱(평

북한에 남아있는 인사는 방학세(중앙재판소장) 김봉률(인민군 대장·인민무력부 부부장) 김학인(조선혁명박물관 관장) 등 3명뿐이다. 소련에서 살고있는 소련파 인사들 가운데 친북성향의 박영빈(전 노동당 조직부장·상업성 부상) 이춘백(전 인민군 소장·7군단 정치위원) 황성복(전 인민군 소장·전시 군사교육처장) 장철(전인민군 중장·전선후방사령관) 김세호(전 인민군 대좌·원산 해군군관학교장) 등 5명은 90년 5월과 8월 김일성의

들면 내무상은 연안파의 박일우에게 넘기고 부상겸 정치보위국장은(후에 사회안전성) 소련파인 방학세를 시켰지요. 48년 1차내각때 고려인이 부상을 차지하지 못한 성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당기관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조선공산당 분국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6·25까지 「팔도장군」으로 불리는 각 도당 위원장은 대체로 고려인이 점했습니다. 이와 함께 당중앙에서도 조직부장 허가이,선전선동부장 박창옥 등이 장악하고 있었지요.』 이같이 잘 조직된 인맥을 가진 소련파는 총수 허가이를 중심으로 스탈린에 의해 「수령」으로 정해진 김일성의 충실한 부하였다. ◎그후 어떻게 됐나/대부분 버림받고 소로… 30여명 생존 소련정부의

댓글